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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FromSputnik

혼자만 올리고 혼자만 보고 싶지만 왠지 모르게 누가 가끔씩 와서 봐줬으면 하는 이상한 블로그
Aug 28 '14
데이지 산책중

데이지 산책중

Aug 28 '14
#Edgewater #Hudson #morning

#Edgewater #Hudson #morning

Aug 24 '14

1. 새로 산 침대가 너무 높아 올라가질 못해, 높은 침대로 올라갈 수 있는 강아지 용 계단을 샀다. 하지만 계단을 무서워해서 간신히 올라와 내려가질 못한다. 플라스틱 재질을 무서워하는 데이지.

침대 밑으로 떨어진 릴리만 쳐다보고 있다. 인형이 혼자 걸어서 침대로 오길 바라는 듯이.

2. 앞 집 아이들이 나와서 공을 튀기니 창문으로.

3. 한국에서.

4. 대갈장군 쇼파에서. 정말로 3등신.

Aug 23 '14

The Seatbelts - Space Lion

Aug 22 '14
Aug 21 '14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중국에서의 지난 날들이 꿈만 같다.

Pentax Me Super을 사서 사진을 찍고 다닌다.

사실 저 사진기로는 인물화 밖에 찍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면 매우 익숙한 곳이라던지.

엄마는 한국으로 동생은 피츠버그로. 데이지와 나는 뉴저지에서 지낼 예정이다.

원래 힘든게 인생이라 힘들다고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힘들어지므로 그냥 아무 말 없이 산다.

여지껏 자신감 없이 살아왔는데, 내가 생각하는 나의 특기는 외국어를 어느 수준까지는 다른사람보다 배이상 빠르게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어느 수준에 도달하면 더 이상 발전이 없다.

Jun 13 '14

2년전 여름이었다. 나의 오랜 중학교 친구이자 고등학교 때 같이 유학생활을 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P집에 놀러갔었다.

페이스 북을 만들지 않았던 나는 대학에 진학후 싸이월드의 몰락과 함께 여러명과 연락이 불가항력적으로 끊기게 되었다. P는 싸이월드와 같이 침몰하지 않은 그 후로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한 몇 안되는 오래된 친구 중 한명이다.

그해 그러니 2012년 초겨울에 있었던 그의 결혼식에 참석을 못해 계속 마음 한 구석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여름에 한국에 나가게 되어서 그의 집을 들렸었다. 상계동에 열평 남짓한 곳에 반전세로 신접살림을 차린 그에게 나는 2주전에 연락을 주고 주말에 찾아간다고 했었다.

그는 연상의 여자랑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결혼식에 참석했었던 M의 말을 들었을 땐 P의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고 했었다. 결국 P의 부모는 그의 결혼식에 오시지 않으셨고 결국 둘이서 치뤘다. 주례도 없었고 단지 친구들의 축가만 있었던 단촐한 결혼식이었다.

토요일이었다. 8월초 죽음의 더위가 시작되었을 즈음, 나는 마트에 들려 집들이 선물로 휴지와 아기 가제손수건 두 다발 그리고 부인이 좋아한다는 아우내 순대를 사갖고 집들이를 갔었다.

무척이나 허름한 아파트였다. 현관에 앞에 있는 먼지가 쌓인 벨을 누르니 부인이 나를 맞이했다. 아기는 나를 보자마자 울었고 나는 P가 화장실에서 나올 때 까지 기다렸다. P의 상계동 집에는 이 무더운 날에도 에어콘은 닫혀있었고, 조그만 삼성 선풍기 만이 아이가 누워있는 곳에 틀어져 있었다.

선물을 건네주고 우리는 서로의 간단한 안부만을 물은 채 말없이 부인이 내온 믹스 커피와 함께 순대를 먹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사실 딱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그는 그의 부인과 함께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었고 나는 여러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마도 그 감정 중 가장 컷던 건, 힘들었을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했던 자책이었으리라.

그리고 나는 나의 여러감정을 털어놓지 못한 채 그 집에서 나와 그들과 헤어졌다. 한국에 들릴 때마다 연락을 하는 그에게 아직까지 그 때의 감정을 털어놓지 못했다. 내가 언제나 그들을 응원한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Jun 6 '14
explore-blog:

These weeks are all we’ve got – the average human lifetime, visualized in weeks, a simple and powerful reminder to live with presence. For how to do that better, get some help from Alan Wat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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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5 '14

"집이 어디에요?"

그래. 집이라… 나에게 있어서 집은 어디일까. 서울에 있는 지난 5년간 아무도 살지 않은, 가끔씩 아빠가 주말에 휴가를 내서 돌아가 청소나 하는 곳이 집일까. 엄마가 있는 뉴저지 집일까. 아니면 지금 아빠랑 살고 있는 중국 집일까. 한국가면 서울집을 말하고 미국 사람들에겐 미국집을 말하고 중국에선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이렇게 간단한 질문앞에서도 나는 맥을 못 추고 무너지고 만다. 나에게 있어서 집이란 어디일까. 그리고 집이란 나의 아이덴티티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 걸까.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었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서. 서울에서 태어나 얼마 안가 안양으로 이사를 갔고 내가 다섯살에 청주로 이사를 갔다. 나의 생생한 연속적인 기억은 청주 유치원 초록반이었을 때 부터 시작된다. 그 전의 기억들은 모두 다 조각나 버려서 아무리 찾으려고 애써보아도 조그만 금성 티비, 단칸방 부엌 식탁, 유치원 모래, 엘레베이터에서 동네 어른께 인사하는 모습, 외삼촌의 낚은 LP판 같은 조각뿐이다. 

청주에서는 분평동 그리고 삼성동으로 이사를 했었다. 삼성동 집엔 처음으로 내 방이 있었는데, 사실 방이라기 보단 나의 작은 장남감 보관소였다. 거기엔 레고가 잔뜩 들어가 있는 박스가 있었는데, 나는 하교 후 그 방에 들어가 혼자서 아니면 친구랑 같이 하루종일 레고만 갖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겨울엔 그 방은 온돌이 없어서 매우 추웠는데, 그래도 방석을 깔고 앉아 레고 맞추기에 몰두 했었다. 가끔씩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아주 넓은 평수 사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워 보였었다. 전세집을 전전했던 우리는 우리집이 아니라 집에 못질 조차 맘대로 하지 못해 액자 하나 제대로 걸어놓지 못했었다. 

그리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었다. 5학년 때 처음 살았던 서울 전셋집은 22동이었다. 그 아파트는 너무나 오래되고 낡아서 수도관이 모두 녹슬어 수압이 좋지 못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우리집은 14층이어서 수압이 더욱 약했었다. 와류식 세탁기를 썼던 우리는 물 소비가 많았는데, 세탁을 하려면 적어도 반나절 물을 틀어 바케스에 담아 모은 후 어머니는 그 무거운 물 대야를 들어 세탁기에 들이부었다. 그 곳에서 2년을 살았는데 그때 엄마 팔이 많이 상하셨었다. 1년 후 아버지는 홀로 구미로 내려가셨고 엄마와 나 동생은 서울에 남겨졌었다. 그 후로 아버지와는 지금 중국에서 같이 살기 전까지 한번도 한집에 같이 살았던 적이 없다.

나에게 있어서 첫 집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서울로 올라오자 마자 살았던 전셋집 바로 옆 동에 산 집이 내 생애 처음 우리집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곳이었다. 대학교 때 이 집을 팔고 맞은편 단지로 이사가기 전 까지 이 집은 계속 우리집이었다.

그후 나는 중3이 끝나고 겨울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채 캐나다로 유학을 갔었다. 캐나다에서도 셰퍼드에 살다 블루어로 그리고 블루어에서 기숙사로.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갔다. 동생과 엄마는 블루어에 있는 캐나다 집에서 2년을 더 있었다. 대학 2년후 엄마와 동생은 보스턴으로 갔고 나는 이타카에 남았었다. 그리고 뉴저지 포트 리로 그리고 다시 에지워터로.

이번에 미국에 잠시 어머니 이사를 도와드리러 갔었다. 역시나 이렇게 이사를 많이 다녔음에도 할 때 마다 토가 나온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이사 후엔 없어진 물건이 나오기 마련이고, 없어진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나의 한 조각이 사라져 가는 느낌이 든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짐을 줄이기 위해 소중한 책들을 정리하게 되고, 나잇값 못하는 물건도 정리하게 된다. 결국엔 나의 역사를 하나하나 정리해 가는건데 그래서 그런지 나는 지금까지 유년기 시절에 소중히 여겼던 물건이 지금까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정말 필요한 하지만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유치원, 초,중,고 졸업장뿐이다. 나의 역사를 정리하다 정작 나의 물질적인 추억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집은 어딜까. 역마살이 껴도 이리 심하게 끼지는 못할 거 같다. 

이젠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데이지가 있는 곳이 나의 집이라고. 

May 22 '14

하루키 카탈루냐 문학상 수상소감 전문.

대학교 1학년 즈음에 쿠바에 놀러갔었다. 거기서 처음 하루키를 접했다. 엄마의 오래된 상실의 시대가 아닌 노르웨이의 숲을 쿠바까지 들고 가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얼마전 세월호 사건을 겪은 우리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하루키의 카탈루냐 문학상 수상 소감을 혼자 읽기는 아까워 여기에 담는다. 참고로 그의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소감도 정말 대단하다.

"지난번 제가 바르셀로나를 방문했던 2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팬 사인 행사를 했는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어 1시간 반이 지나도 팬 사인을 마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시간이 걸렸는가 하니 많은 여성독자분이 저에게 키스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지요.
 
 저는 세계 각처에서 팬 사인회를 가져봤습니다만, 여성독자들로부터 키스해달라고 부탁받은 곳은 여기 바르셀로나뿐입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바르셀로나가 얼마나 멋지고 대단한 도시인지 충분히 알만하지요. 오랜 역사와 더불어 수준 높은 문화를 지닌 이 아름다운 도시를 다시 방문할 수 있게 되어 실로 행복하게 여깁니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오늘은 키스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간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지난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거대한 지진이 일본 동북지방을 덮쳤습니다. 그 규모를 말하자면, (지진으로 말미암아) 지구의 자전 속도가 아주 조금 빨라져 하루가 일백만분의 1.8초가량 짧아졌다고 할 만큼의 지진이었습니다. 
 
 지진 그 자체에서 생겨난 피해도 컸습니다만, 지진 이후에 덮쳐 온 쓰나미가 할퀴고 지나간 흔적도 무시무시했습니다. 장소에 따라선 쓰나미의 높이가 39미터에 달하는 예도 있었습니다. 쓰나미의 파도높이가 39미터라고 하면, 사람이 일반 빌딩의 10층까지 뛰어 올라간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정돕니다. 해안 가까이에 있어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사람들도 많아, 2만 4천 명에 가까운 이들이 희생되었으며 그 중 9천 명에 가까운 이들이 여전히 행방불명된 상태입니다. 아마 이들 중 대다수는 차가운 바다 밑에 잠겨 있을 테지요. 만약 저 자신이 그런 지경을 당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면 가슴이 조여질 정도입니다. 살아남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이 가족이나 친구를 잃고, 집이나 재산을 잃고, 생활공동체를 잃어버려 삶의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아예 뿌리째 날아가 사라져버린 마을이나 촌락도 몇 개인가 있습니다. 살아갈 희망을 빼앗겨버린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일본인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수많은 자연재해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일본의 국토 대부분은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태풍이 지나가는 통로가 됩니다. 년마다 반드시 큰 피해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습니다. 거기다 각지에선 활발한 화산활동이 일어납니다. 현재 일본에는 활동 중인 화산이 108개에 달합니다. 또 물론 지진이 있지요. 일본열도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가장자리에 - 마치 4개의 거대한 접시판 위에 올라타 있는 것 마냥- 위태롭게 위치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지진의 둥우리 위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셈이지요.
  
 태풍이 오는 시기나 그 지나가는 통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만, 지진에 관해서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저 한가지 알고 있는 것은 이번 지진이 끝이 아니며 가까운 장래 반드시 대규모 지진이 덮쳐오리라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차후 20년 또는 30년 내에 도쿄 주변지역에 진도 8에 달하는 대형지진이 엄습하리라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 년 뒤에 일어날는지 혹은 당장 내일 오전에 일어날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도쿄도 내에는 1,300만 명의 사람들이 그날그날의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변함없이 만원 전철에 타고 통근을 하며, 고층 빌딩에서 업무를 봅니다. 이번 지진 뒤에 도쿄시의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라고 물어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무서운 곳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생활하고 있는 건가?
  
 일본어에는 ‘무상無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은 이윽고 소멸하며 모든 것은 머물 곳 없이 모습을 바뀌어 나간다. 영원한 안정(安定)이나 불변 불멸하는 것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불교로부터 전해 내려온 세계관입니다만, 이 ‘무상無常’이란 사고방식은 종교와는 조금 떨어진 맥락에서 일본인의 정신성에 강렬하게 들러붙어 고대로부터 거의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모든 것은 그저 스쳐 지나간다.’라는 관점은, 말하자면 체념의 세계관입니다. 사람이 자연의 흐름을 거슬러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인은 그와 같은 체념 속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아름다움의 존재방식을 찾아내었습니다.
 
 자연에 관해 말한다면, 우리 일본인들은 봄이 되면 벚꽃을, 여름에는 반딧불을, 가을에는 단풍을 즐깁니다. 그것도 관례로 그리고 집단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연을 감상합니다. 벚꽃의 명소, 반딧불의 명소, 단풍의 명소는 그 계절이 되면 사람들로 북적되며 호텔을 예약하기도 어렵게 됩니다.
 
 어째서 그런 걸까요?
 
 벚꽃도 반딧불도 단풍도, 실로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아름다움을 상실해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잠깐의 영광을 목격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단지 아름다움일 뿐만이 아니라 눈 앞에서 덧없이 흩어져 그 작은 빛을 잃어버리고 그 선명한 색깔을 빼앗겨가는 것을 확인하며, 거기에서 오히려 ‘휴~’하고 한숨을 놓는 것입니다.
 
 자연재해가 그와 같은 정신성에 영향을 끼쳤는지 어떤지는, 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차례차례 다가오는 자연재해를,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피해를 집단적으로 극복해가며 살아남는다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런 경험은 우리들의 미의식(美意識)에도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번 대지진에서 거의 모든 일본인은 격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소 지진에는 익숙해져 있는 우리마저 아직도 그 피해규모의 막대함에 기가 질려하고 있습니다. 무력감에 휩싸여 국가의 장래에 불안감마저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나중에 가선, 우리들은 마음을 다잡아 부흥의 길로 걸어나가겠지요. 그 문제에 관해서는 전 아무 염려도 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고 충격으로 주저앉아있을 순 없습니다. 부서진 집은 다시 고쳐 세우고, 무너진 도로는 복구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인류는 지구라는 행성에 제멋대로 얹혀사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살아달라고 지구로부터 부탁받은 것도 아닙니다. 조금 흔들거렸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불평을 놓을 수도 없지요.
 
 여기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건물이나 도로와는 달리 간단하게는 복구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입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윤리이며 ‘규범’입니다. 그것들은 형태를 가진 것들이 아닙니다. 한번 손상되어버리면 이를 원래대로 고쳐놓는 일은 간단치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구체적으로 말해,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에 관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후쿠시마에서 지진과 쓰나미의 피해를 입은 6기의 원자로 가운데 3기는 복구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 그 주변에 방사능을 뿌려대고 있습니다. 원자로 노심이 용융되어 주변의 토양은 오염되었으며, 아마도 상당한 농도의 방사능이 포함된 배수가 바다로 흘러가고 있을 겁니다. 바람이 이를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뜨리고 있습니다.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원자력발전소 주변 지역으로부터 부득이하게 퇴거하였습니다. 밭이나 농장, 상점가 및 항만은 무인지경인 채 내버려져 있습니다. 애완동물이나 가축 역시 내팽개쳐졌습니다. 거기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쩌면 두번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 피해는 일본뿐만이 아니라 - 정말 뭐라 말씀드릴 면목이 없습니다만- 가까운 이웃나라로까지 미칠지 모릅니다.
 
  어찌하여 이처럼 비참한 사태가 일어났는지 그 원인은 분명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던 사람들이 이 정도로 대규모의 쓰나미가 닥쳐오리라고는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찌이 같은 규모의 대쓰나미가 이 지방을 덮친 적이 있으며 안전기준의 재검토가 요구되기도 했습니다만 전력회사는 이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그랬는가 하니 수백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대쓰나미 때문에 거액을 투자하는 일은 영리기업으로서 환영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의 안전대책을 엄격히 관리해야 할 정부 역시 원자력정책을 밀어부치기 위해 그 안전기준의 수준을 낮춘 듯한 기색이 있습니다. 일본인은 어째서인지 여간해선 화를 내지 않는 민족입니다. 묵묵히 참고 견디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나 감정을 폭발시키는 일에는 영 서투릅니다. 그러한 점에서는 바로셀로나 시민 여러분과 조금 차이가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일본인들마저 진심으로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들은 그와 같이 왜곡된 구조의 존재를 그대로 허용해 온, 혹은 묵인해 온 우리들 자신 역시 규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번 사고는 우리들의 윤리나 규범 그 자체와도 긴밀히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들 일본인은 역사상 유일하게 핵폭탄을 투하당한 경험을 겪은 민족입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두 도시가 미군의 폭격기로부터 원폭을 투하당해 20만을 상회하는 인명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남은 사람들 다수가 그 이후 방사능피폭 증상으로 괴로워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례차례 숨을 거두고 있습니다. 핵폭탄이 얼마만큼 파괴적인 것이며 방사능이 이 세계에, 인간의 몸에 얼마나 깊은 상흔을 남기는지 우리들은 이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배웠습니다.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사망자위령비에는 이와 같은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편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을테니」
 
 실로 대단한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핵이라는 압도적 힘의 위협 앞에서는 우리들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그 힘을 끄집어 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힘이 행사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이번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우리 일본인이 역사상 체험하는 두번째의 대규모 핵피해입니다. 그러나 이번은 누군가에게 폭탄이 떨어지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본인 자신이 준비해서 자신의 손으로 잘못을 범하여 자신의 국토를 더럽히고 자신의 생활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해서 그와 같이 되어버렸는지요?
 
 전후 오랫동안 일본인이 품고 있던 핵에 대한 거부감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린건가요? 우리들이 일관해서 추구했던 평화롭고 평화로운 사회는 무엇에 의해 망가져, 뒤틀리게 되었는지요?
 
 답은 간단합니다.「효율」입니다.「efficiency」입니다。
 
 원자로는 효율이 좋은 발전 시스템이라고 전력회사는 주장합니다. 즉 이익이 늘어나는 시스템입니다. 또한 일본정부는, 특히 오일쇼크 이후, 안정적 원유공급이 가능할지에 의문을 품고 원자력발전을 국가정책으로서 추진해왔습니다. 전력회사는 막대한 자금을 선전비로 뿌려대며 미디어를 매수해 원자력 발전은 어디까지나 안전하다는 환상을 국민에게 심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본 발전량의 약 30%를 원자력이 조달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국민이 잘 알지 못한 사이에 이 지진이 많고 비좁으며 붐비는 일본이 세계에서 원자로가 3번째로 많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우선 ‘기성사실’이 만들어졌습니다.
 
 원자력발전에 우려를 품는 사람들에게 “자~그럼 당신은 전력이 부족하게 되어도 괜찮다는 거네요?”, “여름에 에어콘을 쓰지 못하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거네요?” 라는 식의 위협이 가해집니다. 원자력발전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에게는 ‘비현실적 몽상가’라는 딱지가 붙여지게 됩니다. 그런 길을 거쳐 우리들은 지금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안전하고 효율적이어야 마땅할 터인 원자로는 지금 지옥문을 열어 버린 듯한 무참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원자력발전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주장한 「현실을 바라보세요」라는 그 현실이란, 사실은 현실도 뭣도 아니라 그저 표면적인  「편의便宜」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 사람들은 이 편의를 「현실」이란 말로 옮겨 놓음으로써 논리를 뒤바꿔쳐놓은 겁니다. 이번 사고는 일본이 오랜기간 자랑해 온 「기술력」신화가 붕괴한 것임과 동시에, 그와 같은 「바꿔치기」를 내버려 두었던 우리 일본인의 윤리와 규범의 패배이기도 합니다. 
 
「편히 잠드소서. 잘못은 되풀이하지 않을테니」
 우리는 이 말을 다시금 마음에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John Robert Oppenheimer) 박사는 제 2차 세계대전 중 원폭개발의 중심이었던 인물이었습니다만,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준 참상을 알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 제 양손은 피로 물들어 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정갈하게 접어둔 하얀 손수건을 꺼내고서 말했습니다. 「이걸로 닦으세요」
 
그러나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 정도의 피를 닦아낼만큼 정결한 손수건 따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일본인은 핵에 대해 「노」라고 외쳐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저의 개인적 견해입니다. 우리는 기술력을 모두 동원하며, 가지고 있는 지혜를 한데 모아, 사회자본을 투입함으로써 원자력발전을 대신하는 효과적인 에너지개발을 국가차원에서 추진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숨진 수많은 희생자에 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는 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는 우리 일본인이 세계에 진정으로 공헌할 수 있는 크나큰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급속한 경제발전의 도상에서「효율」이라는 안이한 기준에 휩쓸려 이 중요한 이치를 간과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파괴된 도로나 건물을 재건하는 것은 이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나 훼손당한 윤리와 규범을 재생하고자 하는 경우 이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는 분명 수수하면서도 묵묵하게 해 나가야 할, 참을성을 발휘해야 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맑게 갠 봄날 아침 사람들이 한데 모여 밭으로 나가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리듯이 모두가 힘을 합쳐 이 작업을 밀고나가야만 합니다.
 
이처럼 큰 집단작업에는 언어를 전문으로 하는 우리들, 직업작가들이 나서서 기여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윤리와 규범과 함께 새로운 언어를 엮어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기넘기는 새로운 이야기를 그곳에서 움 틔워나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논밭에서 부르는 파종의 노래처럼 사람들을 흥겹게 해주는 율동을 지닌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무상」이라는, 변해가는 덧없는 세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때때로 무력합니다. 그와 같은 덧없음의 인식은 일본문화의 기본적 이데아의 하나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처럼 위기로 가득찬 위태로운 세계에 살면서도, 그럴수록 오히려 활기차게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결의, 그런 적극적 정신성 역시 우리는 분명 갖추고 있습니다.
 
제 작품이 카탈루니아분들에게 평가받아 이처럼 대단한 상을 받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우리는 서로 살고 있는 곳도 떨어져 있을 뿐더러 말하는 언어도 다릅니다. 속해 있는 문화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같은 문제를 짊어지고 같은 즐거움과 슬픔을 껴안고 사는, 같은 세계시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작가가 쓴 이야기가 몇 권이고 카탈루니아어로 번역되어 사람들의 손에 오르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똑같은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깁니다. 꿈을 보는 것은 소설가의 일입니다. 그러나 소설에 그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그 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눠갖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공유의 감각이 없다면 소설가일 수 없는 겁니다.
 
카탈루니아 사람들이 지금까지 긴 역사 속에서 많은 고난을 뛰어 넘고 어느 시기에는 가혹한 일을 겪으면서도 힘차게 살아남아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갖게 된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서로 나눠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분명 많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그리고 카탈루니아에서 우리들이 똑같이「비현실적인 몽상가」가 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세계에 공통되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워나갈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근년 갖가지 심각한 재해나 비참하기 짝이 없는 테러를 겪어 온 우리들이 휴머니티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출발점이 되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꿈꾸기를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이상을 품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편의」나「효율」등의 허울을 둘러쓴 재액의 개들로 하여금 우리 발걸음을 따라잡아 가로막게 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힘찬 발걸음으로 전진해나가는 「비현실적인 몽상가」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번에 받게되는 상금은 지진피해와 원자력사고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의연금으로 기부하고자 합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카탈루니아분들에게, 자날리스타 데 카탈루니아 여러분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 얼마전 로르카 지진으로 희생당한 분들에게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링크: http://sjyoo.tistory.com/104